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고 함께 있다는 것, 물리학을 전공한 교수님과 전자공학을 한다는 것, 보스턴에서 싱글로 남아 있다는 것, 각국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수백종의 와인을 가진 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가진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이 것들은 두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는 이것 저것 할 것 없이 넓은 스펙트럼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선택의 폭이 너무 넓은 나머지 길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분류없음2008/09/20 03:48
분류없음2008/09/20 03:44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을까요? 인생의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은 현재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잘못된 결정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사실 후회는 현재에 대한 부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이 잘못되었으니 그 근원을 찾아내 고치고 싶은 심정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헛된 몸부림입니다. 후회로 과거가 달라질 일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해우소2008/09/19 14:42
바둑은 장기, 체스와 함께 세계 3대 보드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들이 널리 즐기는 게임이다. 체스는 잘 모르겠지만, 장기나 바둑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둑은 멀리 기원전 2천년경 요임금이 만들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있고, 장기는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인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오래된 게임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그 무한한 경우의 수에 있다. 특히나, 바둑은 무한한 전개가 가능한 게임이다. 간단하게, 바둑판에 있는 19x19 = 271개의 공간 중 100곳만 채운다고 쳐도, 100 ! 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이는 9.3326x10^157 에 달하는 숫자이다. 10의 8승이 1억임을 감안해볼 때, 얼마 정도 인지 짐작도 안되는 숫자이다.
그런 게임을 바둑 기사들은 수를 내다보고, 계가를 한다.위의 숫자만큼의 경우의 수를 내다본다면 아마 죽기 전에 바둑 한판 두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하나 하나의 행마에 담긴 정보의 차이 때문이다. 즉, 수많은 경우의 수 중 오직 머리 속에 담을 수 있는 정도의 수 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초반 포석이 이제 막 진행되는 시점, 바둑알 한 두개 정도 흩뿌려 놨을 때, 한 가운데에다가 돌을 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란 것이다. 네귀의 마지막 위치(예를 들어 (19,19)) 에다가 돌을 놓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듯, 의미 있는 정보의 수가 제한이 되기 때문에 바둑은 비로소 사람들이 계산 가능한, 파악 가능한 게임이 된다. 하지만, 바둑의 묘미는 이 의미있는 행동을 모두 알기 어려우며, 때에 따라 그 의미의 경중이 달라지는 데 있다. 정보 파악력이 뛰어난 기사들은, 따라서, 현재 기보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승부에서 유리한 자리에 오르게 된다. 뛰어난 마무리 능력을 가진 이창호가 그 예다. 상대방이 미처 다 계산하지 못한 반집 조차 이창호에게는 꽃이 되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창의력이 돋보이는 뛰어난 바둑 기사들은 새로운 수로서 의미를 창조하고 그것을 상대방이 미처 파악하기 전에 제압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경우의 수, 그 가운데에서도 수많은 의미있는 수(정보를 가진 수) 를 가진 바둑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 위대한 바둑 스승들께서는 특히나 중요한 수를 파악하여 전하였으니, 그것은 '바둑 격언(혹은 명언)' 이라고 한다. '붙이면 젖혀라', '젖히면 끊어라', '좌우 동형 중앙 급소', '두점 머리는 두드려라' 등 바둑판을 들여다보자니 답답한 우리내 머리를 깨우쳐 주는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명언들이다. 이 중 내가 오늘 하고자 하는 말은 '이립 삼전'이다. 둘로 늘어섰으면 세칸 뛰어라는 뜻이다. 초반 포석 시 많이 보게 되는 행마법이다.
'二立 三展'. 이립은 공자의 '而立'과도 발음이 같다. 공자의 이립은 뭔가.공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그가 나이 30에 이르러 뜻을 세웠다는 말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공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는 드디어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고,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흔히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고 15년간 정진하여 30세에 이르면 과거에 합격하곤 했다. 올해가 공자가 탄생한 지 2558년이 되는 해이니, 공자는 적어도 2000년간의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던 게다. 어쩌면 2558년간의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자는 그가 말한 이립을 바둑의 이립과 연결짓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억지스럽게 보일 지 모르지만, 이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자. 그럼 무엇이 되는가? 뜻을 세우고 나이 서른이 되니 세칸 뛰라, 이 말이다. 세칸 뛰면 상대방은 살짝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뭐 아님 말고. 살짝 들어다 보면 붙이고, 붙이면 젖히다 보면 좁지만 내 집이 생긴다. 이런. 그렇다,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틈틈히 끊어먹을 자리가 생기고, 허술해 보이지만 집은 집이다. 나중에 맛보기만 조심하면 된다. 즉, 이립 삼전이면 일가를 이루게 된다. 사나이 나이 서른에 자그마한 집한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보자. 내 나이 이제 서른이다. 이립이니 세칸 뛰어야 할 시점인게다. 세칸 뛴다고 어디 붕 뜨란 말은 아니다. 세칸 뜀은 곧 내 공간을 만듬을 뜻한다. 팔을 양 옆으로 넓게 펴면 세칸 정도는 나올 지 모른다. 즉, 그렇게 넓은 가슴을 갖고 세칸 정도는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세칸 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을 두고서 붙이면 젖히고, 젖히면 끊으면서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세 칸 뛰면 이웃집도 보인다. 친구들도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세칸 뜀으로서 손을 내민다. 그것이 삼전에 숨겨진 정신이며, 공자가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는 말이다. 아, 이 얼마나 놀라온 선견 지명인가.
나이 30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날씨가 추워진다. 손발이 시려온다. 삶아먹는 계란이 한판이고, 못난이 그림을 그리던 연필이 두다스 6자루며, 두터운 양말이 15켤레다. 완전수 6을 5번이나 더한 숫자며, 강산은 세번이나 변한다. 스물에 시작한 자유로운 삶의 여정은 벌써 십년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마무리를 지을 때는 아니고, 시작을 생각할 때도 아니지만, 1년의 3/4가 지나가는 이 시점에,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부푼 꿈을 하버드 교정에서 펼치려는 이 찰라에, 내 나이 29 3/4인 이 시점에, 공자의 진짜 '而立'을 생각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나의 구라 '二立'을 생각하며 넓고 열린 가슴을 가질 수 있는 내가 되길 진정 바라는 마음이다.